오랫만에 내가 내 자신을 돌아보았다.
내가 보지 못한 세상이 내가 읽지 못한 세상이 그렇게 보여질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오래전 읽었던 아니 오래전 부분만을 알고 다 읽은 것 처럼 느낀 책이 나도 모르는 세상과 마주쳤을때 느껴지는 당혹감이란 아주 크게 다가오게 되었다.
저자 조너선 스위프트
제목 걸리버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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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에 대하여
조너선 스위프트는 1713년부터 더블린의 세인트패트릭 성당 참사원장을 지냈으며 영어 풍자문의 대가이다.
유명한 〈걸리버 여행기 Gulliver's Travels〉(1726)를 비롯해 〈지어낸 이야기 A Tale of a Tub〉(1704)·〈책들의 싸움 The Battle of the Books〉(1704)·〈겸손한 제안 A Modest Proposal〉(1729) 등 유명한 풍자문을 썼다.
초기생애와 교육
할아버지 토머스 스위프트는 헤리퍼드셔 구드리치의 교구신부로서, 청교도혁명 동안(1642~51) 변함없이 왕당파를 지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 조너선은 3형제와 함께 왕정복고 뒤 아일랜드에 정착하여 더블린의 킹스인 시종장이 되었다. 아버지는 1664년에 애비게일 에릭과 결혼했는데, 그녀는 아일랜드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잉글랜드 레스터셔의 목사 딸이었다. 부모에게서 1666년 5월에 누이 제인이 태어났으나, 1667년 봄 아버지가 갑자기 죽어 그의 어머니와 어린 누이, 그리고 뱃속에 있던 조너선 스위프트는 아버지의 형제들에게 맡겨졌다.
조너선 스위프트는 아버지가 없이 삼촌들에게 의존하면서 안정된 가정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늘 불안감을 느꼈다. 그러나 스위프트는 교육을 못 받은 것은 아니어서 6세 때 당시 아일랜드 최고의 명문이던 킬케니 스쿨에 들어갔고, 1682년에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했다. 이후 몇 년 뒤에 썼다가 스위프트가 죽은 뒤인 1755년에 출판된 미완성 자서전 〈스위프트가(家) Family of Swift〉에서 그는 자신이 '가까운 친척들의 학대 때문에' 낙담하고 풀이 죽어 학업을 소홀히 한 까닭에 1686년 '특별한 배려'로 문학사학위만 받을 수 있었다고 기록했다.
실제 대학시절 성적은 평균 정도였으며, 조너선 스위프트가 받은 학위도 학생의 성적이 규정에 약간 못 미칠 때 주던 것이었다.
조너선 스위프트는 인문학 석사학위 신청자로 1689년 2월까지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머물렀다. 그러나 1688년 명예혁명 뒤 더블린에 무질서가 만연하자 대학 당국은 학생들에게 안전한 곳으로 피신할 것을 권했다. 스위프트는 잉글랜드로 피신했고, 어머니를 방문한 뒤에 주로 서리 주 무어파크에 있는 윌리엄 템플 경의 집에서 템플이 1699년 1월 죽을 때까지 지냈다.
무어파크 시절
학식이 풍부했던 템플은 회고록을 쓰고 수필을 출판할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서가 필요했다.
조너선 스위프트가 무어파크에서 계속 지내지 않고 아일랜드에 2번 돌아갔던 것으로 보아 그곳 생활이 안정적이지 못했던 것 같다. 아일랜드에 2번째 갔을 때 영국국교회의 성직자가 되었고, 1695년 1월 13일에 사제로 임명받았으며, 1월말 벨파스트 근처 킬루트 교구신부가 되었다.
조너선 스위프트가 지적으로 성숙하게 된 것은 템플의 풍부한 장서를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었던 무어파크에서였다.
또한 여기서 템플 집의 가정부로 있던 과부의 딸 에스터 존슨(뒤에 스텔라가 됨)을 만났다. 그녀는 조너선 스위프트가 처음 무어파크에 왔을 때 8세의 검은 머리 소녀였는데, 스위프트가 그녀의 교육을 일부 맡으면서 둘의 사귐이 시작되었다. 하트홀에 들어간 뒤 1692년 템플의 주선으로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693년에는 입법 문제에 대해 템플의 조언을 부탁했던 윌리엄 3세와의 협의회에 템플의 대리인 자격으로 파견되어 켄싱턴으로 갔다.
1691~94년에 6편의 송시를 비롯한 여러 편의 시를 지었다.
초기시는 한때 혹평만 받기도 했으나,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가 호평한 뒤부터 호의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조너선 스위프트의 천재성이 진가를 발휘한 것은 시에서 산문풍자로 방향을 바꾸어 1696~99년에 무어파크에서 걸작 〈지어낸 이야기〉를 쓰면서부터였다. 1704년에 익명으로 출판한 이 작품은 '종교와 학문에서 심하게 만연된 부패'를 풍자한 〈이야기 Tale〉, 해학적 영웅체로 쓴 〈책들의 싸움〉, 당시 광신도들의 예배와 설교방식을 조롱한 〈정신의 기계적인 움직임에 대하여 Discourse Concerning the Mechanical Operation of the Spirit〉라는 서로 연관된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종교인으로서의 활동
1699년 1월에 템플이 갑자기 죽음으로써 조너선 스위프트는 다양한 체험을 겪는 불확실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해 여름에 조너선 스위프트는 더블린으로 돌아가 목사이자, 아일랜드에 재판관으로 오기로 된 버클리 백작의 비서가 되었다. 그뒤 1701, 1702, 1703, 1707~09년에 영국에서 지냈으며, 매력적인 성품과 작가로서의 재능이 런던에서 널리 인정받았다. 그외에 스위프트의 입장이 바뀐 것은 없었다. 스위프트는 무어파크에서 지낼 때 이미 킬루트의 신부직을 그만두었으나, 1700년초에는 더블린에서 멀지 않은 라러코 교구 신부직을 비롯해 아일랜드 교회의 여러 직책에 임명되었다.
이때 출판된 작품을 보면, 조너선 스위프트가 아일랜드와 영국에서 일어난 일에 모두 깊이 관여했던 것 같다. 여러 글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아테네와 로마의 귀족과 평민 사이의 논쟁과 불화에 대하여 Discourse of the Contests and Dissensions between the Nobles and the Commons in Athens and Rome〉(휘그당의 원칙에 대한 설득력있는 진술인 동시에 두 정당의 자제를 촉구하는 글)·〈종교의 발전과 관습의 개혁을 위한 계획 A Project for the Advancement of Religion, and the Reformation of Manners〉·〈종교와 정부에 대한 영국 교회의 입장 The Sentiments of a Church of England Man with Respect to Religion and Government〉이다.
런던에서 조너선 스위프트는 점점 유명해졌다. 종교와 정치에 관련된 평론은 진지하면서도 아이러니로 가득 찼으며, 1704년에 출판된 〈지어낸 이야기〉는 익명으로 발표되었지만 스위프트의 글로 통했다. 1708~09년에 발표한 유명한 〈비커스태프〉 팜플렛을 비롯한 장난스러운 글에서는, 유명한 점성술사 존 패트리지의 죽음을 먼저 예언하고 그뒤 죽은 상황을 상세하게 묘사하여 패트리지의 점술업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러한 여러 작품과 리처드 스틸이 1709년 〈태틀러 The Tatler〉지에 실은 짧은 시 〈아침의 묘사 A Description of the Morning〉처럼 침울한 분위기이지만 재미있는 작품들은 조지프 애디슨이 이끄는 휘그파 작가는 물론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조너선 스위프트가 휘그당의 정책에 불만을 느낀 것은 분명하다.
조너선 스위프트는 출생이나 교육으로 보아도 휘그파였고, 자신의 글에서 개진한 정치원리도 17세기 휘그파의 전통에 속했다. 한편으로는 영국국교회를 열렬히 신봉했기 때문에 휘그당이 비국교도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염려했다. 스위프트는 충성심에서 점점 갈등을 느끼게 되었다.
1710년 9월 7일 다시 런던에 가면서 또다른 중요한 전기가 시작되었다.
로버트 할리(뒤에 옥스퍼드 백작)와 헨리 세인트 존(뒤에 볼링브로크 자작)이 이끄는 토리 내각이 휘그 내각을 대신하게 되었는데, 새 행정부는 프랑스와 적대관계를 종식시키고자 노력하는 한편 영국국교회를 보호하는 정책을 취했다. 너무나 빨리 변화하는 세계에 대한 조너선 스위프트의 반응은 유명한 〈스텔라에게 쓴 일기 Journal to Stella〉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글은 스위프트가 영국에 온 1710~13년에 당시 더블린에 살고 있던 에스터 존슨과 그녀의 친구 레베카 딩글리에게 쓴 편지이다.
빈틈없는 할리는 풍자시인이자 팜플렛 저자인 다니엘 디포와 이미 사귀어 그로부터 귀중한 정치적 도움을 얻었다. 할리는 조너선 스위프트에게 앤 여왕의 하사금을 아일랜드 교회도 받게 해주겠다고 약속해 그를 토리 당원으로 만들었다. 스위프트는 이로써 정당보다 교회를 우위에 두기는 했지만, 정부의 성격에 관한 한 깊이 뿌리박힌 휘그주의를 포기할 수 없었다. 토리당이 옛날부터 주장한 왕권신수설을 인정할 수 없었던 스위프트는 국민 전체로부터 비롯되고 영국의 법에 의거한 최고 권력은 왕과 신하와 평민이 함께 행사해야 하며, 전제정치가 생겨나지 않도록 이들 간에 균형이 유지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조너선 스위프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토리당을 대표하는 정치작가가 되었으며, 1710년 10월말에 토리당의 기관지 〈이그재미너 The Examiner〉를 맡아 1711년 6월 14일까지 계속 편집했다. 그뒤에는 토리당의 평화정책을 지지하는 팜플렛을 쓰기 시작했다. 평화를 촉구하는 움직임이 있기 몇 주 전인 1711년 11월 27일에 나온 〈동맹자의 처신 The Conduct of the Allies〉이 마침내 국회에 전달되었다.
각료인 친구들이 조너선 스위프트의 공헌을 낮게 평가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뒤늦게 1713년 4월이 되어서야 공석이었던 영국의 교구도 아닌 더블린의 세인트패트릭 대성당 참사회장 자리를 보상으로 받았다. 여왕과 많은 세도가들이 〈지어낸 이야기〉를 불경스럽게 여기고 스위프트가 영국에서 직책을 얻지 못하게 막았던 듯하다. 어떤 경우든지 스위프트처럼 아일랜드 태생인 사람들은 영국에서 참사회장이나 주교가 될 수 없었다.
아일랜드 은둔기
1714년 8월에 앤 여왕이 죽고 조지 1세가 등극하면서 토리당은 권력을 잃고, 영국에서 조너선 스위프트의 활동도 끝났다.
조너선 스위프트는 아일랜드로 가서 1726, 1727년 영국을 방문한 것을 빼고는 여생을 그곳에서 지냈다. 처음에 아일랜드계 휘그파에게 경멸과 무시를 받자 그는 세파에 시달리고 지쳐서 교구에만 은거했다. 그러나 점차 힘을 회복하여 1720년쯤에 공적인 일에 새롭게 관심을 보였고,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해 1720~30년대 초반까지 계속 시를 썼다. 이무렵 아일랜드에서 발표한 팜플렛에서는 당시 아일랜드가 직면한 사회적·경제적 문제를 다루었다.
조너선 스위프트의 어조와 문체는 직접적인 사실의 제시에서 권고, 유머, 신랄한 아이러니까지 다양했다. 스위프트는 아일랜드의 현실에 대한 인식과 로버트 월폴 경이 이끄는 휘그 내각을 공격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계속 일을 해나갔다. 아일랜드의 낙후성을 주로 영국 정부 탓으로 돌리면서도 동시에 아일랜드인 스스로가 자신들의 운명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했다.
이때 쓴 글 가운데 〈드래피어의 편지 Drapier's Letters〉(1724~25)·〈겸손한 제안〉이 가장 유명하다. 앞의 작품은 더블린의 M.B.라는 직물상이 쓴 편지 시리즈라는 말이 있으며, 아일랜드에 구리 동전(1/2 페니)과 청동화(1/4 페니)만 제공하려는 영국 정부의 계획을 공격하는 내용이다. 〈겸손한 제안〉은 공공심이 강한 한 시민이 가난한 부모의 아이들을 부자의 음식으로 쓴다면 경제여건이 조금 나아지리라고 제안하는 섬뜩한 아이러니가 담긴 충고 편지이다.
조너선 스위프트의 사생활과 관련된 몇몇 사건과 이로 인한 추측을 정리해보면 진상은 다음과 같다.
스텔라는 1700년 혹은 1701년에 아일랜드로 이사온 뒤 레베카 딩글리와 계속 함께 지냈다. 한편 런던에 체류중이던 1707~09년에 조너선 스위프트가 바네사라고 부른 또다른 여성 에스터 배넘리가 등장해 1714년에 스위프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를 따라 아일랜드로 왔다. 그녀가 스위프트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에 대한 열정이 잘 드러나 있다. 이러한 사실 배후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가? 스텔라와 스위프트는 비밀리에 결혼했는가? 오랫동안 나돈 일설에 의하면 그들은 1716년 명목상의 결혼을 했다.
스텔라가 윌리엄 템플의 사생아여서 조너선 스위프트가 그녀와 공개적으로 결혼하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바네사가 아일랜드에 온 뒤로 매우 불안해진 스텔라가 마침내 결혼을 요청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스텔라와 스위프트가 템플을 아버지로 둔 이복남매이고 그들이 결혼한 직후에 이 사실이 밝혀졌다는 소문도 자자하다. 스위프트와 바네사의 관계는 어떤 것이었는가? 스위프트가 단지 그녀의 친구였는지, 아니면 연인이었는지도 의문시된다. 소문에 따르면 이 둘 사이에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인정 많은 스텔라가 이 아이를 돌보았다고 한다.
데니스 존스턴의 〈스위프트 연구 In Search of Swift〉(1959)에서는 조너선 스위프트의 아버지가 윌리엄 템플 경이 아니라 템플 경의 아버지여서 스위프트와 스텔라는 숙부와 조카 사이이며, 그들은 결혼하지 않았고, 스위프트와 바네사는 친구 이상의 사이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추측들 중에 명백한 증거를 내세울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당사자들에게는 실제 이 사건이 그다지 특별한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스텔라는 1728년 1월에 죽었다.
대표적인 풍자문학 〈걸리버 여행기〉의 초판이 이미 1726년 10월에 출판된 뒤였다. 이 작품을 언제 시작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조너선 스위프트의 편지에 의하면 1721년쯤에 본격적으로 쓰고 있었고 1725년 8월에 끝마쳤던 것으로 보인다. 1714년 이래로 영국에 가지 않았다가 1726년에 작품 원본을 갖고 방문했는데, 스위프트는 알렉산더 포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작품의 의도가 "세상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려는 것이 아니라 화나게 만들려는 것"이라고 했다. 트위크넘에 사는 포프를 방문하여 옛 친구들과 만났으며, 그곳에서 출판 준비를 마쳤다.
〈걸리버 여행기〉는 조너선 스위프트가 더블린으로 돌아간 뒤 10월 28일에 출판되었다. 이 작품은 즉각 성공을 거두었고, 그후로도 계속 모든 계층의 독자들을 즐겁게 해주기도 하면서 '화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걸리버 여행기(Gulliver's Travels)
ⓒ Galileo01/wikipedia | Public Domain
말년
조너선 스위프트의 말년에 대해서는 잘못 전해진 부분이 많다.
조너선 스위프트가 말년에 자제력이 부족했고 다루기 힘든 성미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미쳤다는 추측도 있다. 스위프트는 어려서부터 오늘날 메니에르 병으로 알려진 귓병을 앓아 가끔씩 현기증과 구토를 일으켰다. 그러나 정신에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아 1730년대 내내 더블린의 중요한 시민, 아일랜드의 위대한 애국자, 성직자로서 활발히 활동했다. 1739년 가을에 스위프트에게 경의를 표하는 성대한 행사가 열렸다. 그러나 스위프트는 이미 신체적으로 약해져 있었고 곧 마비증세와 실어증을 앓았다. 1742년에는 보호자를 두어야만 했고 1745년에 죽어 세인트패트릭 성당에 묻혔다.
벽면에는 조너선 스위프트가 직접 쓴 다음과 같은 라틴어 비문이 새겨졌다.
"신학박사이자 이 성당의 참사회장인 조너선 스위프트의 시신이 이곳에 묻혀 있다. 이제는 맹렬한 분노가 더이상 그의 마음을 괴롭힐 수 없으리라. 나그네여, 떠나시오. 그리고 가능하다면, 전력을 다해 지고의 자유를 얻으려 한 이 사람을 본받으시오."
조너선 스위프트(Jonathan Swift)
세인트패트릭 성당 내 비문
ⓒ Wknight94 / wikipedia | CC BY-SA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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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그를 알아보니 화나게 하려고 쓴 이 걸리버 여행기가 요즘의 블랙코메디화 되어 읽혀지고 영화와 되어지고 있는 것을 보니 참 재미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1726년에 출판된 걸리버 이야기가 현재의 우리나라와 다르지 않게 보이는건 화나게 만들고 싶었던 그 모습 그대로 더불어 민주당이든, 국민의 힘당이든, 정의당이든 여전히 화나게 만들고 있지 않은가?
걸리버 여행기는
1부 소인국 이야기
2부 거인국 이야기
3부 라퓨타 섬 여행기, 럭낵 섬 여행기
4부 마인국 이야기
로 나뉘어 있다. 사실 이전에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은 1부만 이였고 2부는 영화에서나 본듯하다. 3부는 일본 만화영화의 "천공의 섬 라퓨타"의 모델이란 걸 알았으며 4부는 이제사 알게 된 내용이다.
1. 소인국 릴리펏 왕국에 도착했지만 많이 먹기도 하니 죽이려했으나 온순한 걸리버를 왕이 처형을 하지 않았죠. 그런데 그 모양세가.. 간신배가 득실거리고 당파 싸움을 하는 영국의 로마 카톨릭 교회와 청교도 간의 갈등을 서술하죠.
2. 거인국에선 브롭딩낵의 왕비 곁에서 춥추곤 있지만 "너희 나라 사람들은 가장 악독한 해충이다" 라는 문구에서 처럼 영국정치인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인 시각을
3. 하늘을 나는 섬의 얼음으로 화약만들기 지붕부터 집짓기 인간 배설물로 음식 만들기등의 현실과 동떨어진 연구에 매몰된 영국 상황을 풍자 했으며 영생을 달리보는 럭낵 섬에선 200세면 대화가 불가능해지고 경멸과 증오의 대상이 되는 것을 보고 다시금 화를 둗구게 되었다.
4. 말은 지혜롭고 인간은 저열하며 이를 인간의 탐욕적인 본성을 비판하고자 했을 진데.. 물론 18세기의 영국이라면 5000년 역사를 가졌다는 우리는 현재의 모습과 뭐가 다를 것인지 모르겠다.